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프레트 요들 (문단 편집) == 개요 == >"절대적으로 판세가 불리할 때는 한 장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어 보는 모험도 해볼만 하지 않겠는가?" >-[[아르덴 대공세]]를 앞두고 한 말. [[독일 국방군]]의 [[육군]] [[장성급 장교|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상급대장]].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실질적인 작전 담당자로서 [[폴란드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등 여러 군사 작전의 입안자였다. 나치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 지휘참모부장이며 사실상 3군의 [[총참모장]]격 임무를 수행하였다. 많은 국방군 출신 장성들이 회고록에서 증언하듯 명석하고 유능한 참모였고 그러한 실력을 인정 받아 OKW 소속 참모 중에서는 흔치 않게 OKH와 장교들이나 일선 육군 사령관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침착한 성품에 항상 조용한 어조로 1945년 4월의 작전 회의에서도 감히 히틀러에게 반대 의견을 말할 만큼 배짱을 갖고 있기도 했다. 요들은 [[프란츠 할더]]와 달리 1차 대전에서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졌고 일선 연대장으로 근무한 경험도 있는 덕분에 이를 히틀러에게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의 패배가 다가왔을 때 후계자였던 해군원수 [[카를 되니츠]] [[제독]]의 측근 중 한 명으로, [[연합국]]과의 항복 협상을 주도하였으며 1945년 5월 8일에 첫 번째 항복 협상 때 대표로 서명[* 이후 소련의 이의 제기로 다음날 다시 치러진 베를린에서의 항복 서명은 상관인 국방군 [[원수(계급)|원수]] [[빌헬름 카이텔]] [[장군]]이 대표로 했다.]했다. 전후 내각 구성원이 전원 체포되면서 전쟁범죄자로 구속되었다. 이 때 소련의 반대로 군복의 계급장 및 서훈 등을 강제 탈거했다.[* 이는 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과 해군원수 [[에리히 레더]], 해군원수 [[칼 되니츠]], 공군원수 [[헤르만 괴링]]도 마찬가지. 군인들은 전부 서훈, 훈장 등 군복의 치장들을 소련의 반대로 전부 다 강제 탈거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선고받고 [[총살형]]을 요구했으나 소련의 이오나 니키첸코 판사가 소란을 피우면서까지 극구 반대했기 때문에 현역 군인임에도 [[교수형]]에 처해졌다. 다만 후술하겠지만 사형 후에 반나치 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가 다시 미국의 반대로 번복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되어 처형된 사람들 중 잠시만이라도 판결이 번복된 건 요들이 유일하다.] 아직도 다른 사형수들과는 달리 전쟁범죄 유죄 판결이 정당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 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